예수전도단에서 출판한 책 중에서 진 에드워드의 [블루 칼라 예수]라는 책이 있는데, 노동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삶 곧 복음서에서 언급되지 않은 목수로서의 삶을 짧은 이야기로 다루어 냈습니다. 비록 짧은 책이었지만, 목수로서 힘들게 살아왔던 예수님의 인생이 참 고달팠고, 그렇기에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요 5)는 말씀을 하실 수 있었겠구나 싶었습니다. 그렇게 그 책을 읽은 지 몇 년이 지나, 현재 에끌툰이라는 크리스찬 웹툰 사이트에서 연재되는 ‘예수는 열두 살’을 보는데, 솔직히 위경 만들어내는 사람 아닌가 싶었을 정도로 성인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자기 사명도 모르는 철없는 소년으로만 치부하는 게 너무 마음에 걸렸습니다. 스토리에서 영적 적용이라는 알맹이조차 찾을 수도 없었죠.
예수님의 삶(Life of Christ), 즉 4복음서를 배우는 강좌를 듣고 있었을 때, 담당 교수님이신 릭 하우크[Rick Houk] 교수님께서는 누가복음 2장에서 나오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사를 통해서 12살 이후로부터 30대에 이르기까지의 예수님의 인생을 추측하셨는데, 그 내용이 마음에 너무 와 닿기에 한번쯤 같이 묵상하고 나눠보면 해서 제가 들었던 강의의 일부를 스포일러 겸 공유하고, 저의 표현으로 서술해보고자 합니다.
1. 갓 성인이 되어.
누가복음만이 가지고 있는 특징이 뭐냐 한다면, 예수님과 요한의 탄생 전후의 내용과, 예수님의 유년기가 기록되어있다는 점이라 하겠죠. 예수님의 유년기가 거론되는 2장의 후반부는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41 이제 그분의 양친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에 갔더라.
42 그분께서 열두 살 되셨을 때에 그들이 그 명절의 관례대로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43 그 날들을 채우고 돌아갈 때에 아이 예수님은 뒤에 남아 예루살렘에 머무셨더라. 요셉과 그분의 어머니는 그것을 알지 못한 채
44 그분이 일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간 뒤 자기들의 친족과 친지들 가운데서 그분을 찾되
45 발견하지 못하였으므로 그분을 찾으면서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니라.
46 그들이 사흘 뒤에 그분을 성전에서 발견하였는데 그분께서 박사들 한가운데 앉으사 그들의 말을 듣기도 하시며 그들에게 문제들을 묻기도 하시더라.
47 그분의 말을 들은 모든 자들은 그분께서 깨닫고 답변하시는 것들로 인하여 깜짝 놀라더라.
48 그들이 그분을 보고 놀라며 그분의 어머니는 그분께 이르되,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하매
49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
50 그들은 그분께서 자기들에게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51 그분께서 그들과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그들에게 복종하시더라. 그러나 그분의 어머니는 이 모든 말씀을 마음속에 간직하니라.
52 예수님께서는 지혜와 키가 자라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호의를 입으시더라.
예수님께서는 열두 살에 명절의 관례에 따라 성인식을 치르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그러하듯, 성인이 되었다는 것은 독립을 하여 가장으로서 가족들을 부양하는 책임을 질 나이가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생각해보면 스물인데 둘 중 하나도 하지 않은 저는 자괴감이 살짝 듭니다. 이제 나사렛으로 귀환할 때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서는 성전에서 어르신들과 토론을 주고받으시기까지 하셨는데, 이런 점만 보아도 당시의 예수님에게는 적어도 철없는 이미지가 없었다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지금 표현으로 애늙은이라고 생각하시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신성모독적인 의도가 아님을 밝힙니다...)
‘자기 자식이 얼마나 성장하건 간에 부모 눈에는 그저 아이다,’라는 표현이 있듯이, 마리아도 그러한 마음으로 갓 성인이 된 예수님을 사방팔방 찾으러 다녔을 것입니다. 요셉도 마리아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보호자로서 책임을 가지고 예수님을 찾으러 다녔을 것이고요.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잃어버렸다." 하며 돌아다니다가 성전에서 그분을 발견하시고 자신의 아이의 숨겨진 실체(?)를 보고 놀란 마리아가 하는 말이 이렇습니다.
48 그들이 그분을 보고 놀라며 그분의 어머니는 그분께 이르되, 아들아, 네가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며 너를 찾았노라, 하매
고3을 지나 20세가 되어 어른이 되었다고 해도 많은 면에서 걱정이 되는 판인데, 성인식에 따라 성인이 되었던 예수님이 그보다도 어린 12세였던 것을 고려해 보면 걱정이 안 될 리는 없을 것입니다. 마리아가 저렇게 반응하여 대답하는 것이 당연한 건데, 그냥 넘어가도 별 문제 없어 보이는 말을 예수님께서는 정확하게 짚어내시며 즉각적으로 수정하다 못해 자신의 사명에 대해서 말씀합니다.
49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어찌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반드시 내 [아버지] 일을 해야 함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라.
여기서 이 말씀을 들은 대상이 마리아만이 아니었다는 점을 보셔야 합니다. 이제 막 어른으로 간주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12년 동안 보호자로서 자신을 잘만 키워주신 양친 요셉에게 돌려 말할 것도 없이 ‘당신은 내 아버지가 아닙니다.’라고 돌직구를 날리신 것입니다. 독자로서 우리에게는 당연한 소리지만 보호자로서 아버지의 역할을 해 왔던 요셉은 이게 무슨 소리인가 싶었을 것입니다. 목수의 아들로서 거듭 불리기까지 하는데 도대체 왜 저런식으로 말하는가 하며 그 말씀을 깨닫지 못했던 것이죠. 그럼에도 예수님께서는 나사렛으로 돌아가서도 양친인 요셉과 어머니인 마리아에게 동일하게 복종하며 성인으로서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 이후로 요셉은 살아서 뭐 했다는 등의 언급이 더 이상 나타나지 않게 되죠. 하우크 교수님은 누가복음 2장 이후로, 예수님께서 자신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를 정확하게 인지했던 시점에서 얼마 안 가 양친인 요셉이 죽었을 것이리라고 결론을 내셨습니다. 결과적으로 이런 가정에 근거해서, 성인이 된 그 해로부터 아버지 없이 살았던 시점을 수학적으로 계산해 보면, 공생애 기간을 제외하고 무려 18년이라는 답이 산출됩니다.
+ 아, 물론 성인식이 있었다는 게 전형적인 견해이기는 한데, 성경에 근거한 것은 아니라서 다른 견해도 있습니다. 성경에서 말한 그대로, 12살에 예수님은 유월절을 지키러 갔던 것이었고, 출애굽기 30:14절은 성경적으로 성인이라고 계수되는 시기가 스무 살이라고 제시하는데 (그 때에 혼의 속죄를 위해 주님께 반 세겔을 냅니다.), 요셉이 네 명의 아들들과 x명의 딸아이들을 두었기 때문에 8년이라는 시간이 더 주어진다면 출생에 있어 시간상으로 적절하기도 하고, 스무 살에 예수님께서 어른으로 간주되시고, 요셉이 그 시점에 낙원으로 가셨다고 한다면 실질적으로 그게 타당하기도 합니다. 아이들이 출산되기까지도 시간이 걸리니까요.(이래서 야곱의 아들들의 출생 시점 잡는 게 힘들지도...?) 그렇다면 공생애 이전까지 10년 간 아버지 없이 살았다는 또 다른 결론이 산출되는데, 그래도 만만치 않은 시간입니다.
2. 집안의 가장으로서.
분명한 것은, 어느 시점에 요셉이 죽었는지에 상관없이, 예수님께서는 공생애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요셉의 뒤를 이어 가장으로서, 목수로서 가업을 이어서 어머니와 자신의 동생들을 포함한 가족의 생계를 유지해야만 했다는 점입니다. 그리고 나사렛 사람들이 다 그가 목수라고 알아볼 정도로 긴 시간을 나사렛에서 목수로 일하면서 지냈습니다. 수년간의 노동으로 온 몸에 굳은살이 박혔을 예수님, 누가 그분을 성전의 박사들과 토론해도 꿀리지 않는 말씀이자(요1:1)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겠습니까?
안식일이 되어 그분께서 회당에서 가르치기 시작하시매 많은 사람들이 그분의 말을 듣고 깜짝 놀라 이르되, 이 사람이 어디에서 이런 것들을 얻었느냐? 그가 받은 지혜가 어떠하기에 그가 자기 손으로 이런 능력 있는 일들을 행하느냐?
이 사람은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세와 유다와 시몬의 형이 아니냐? 그의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그분으로 인해 실족하니라. (막 6:2-3)
남동생 네 명뿐만이 아니라 여동생까지도 몇 있었다는데, 가장으로서의 부담이 얼마나 컸을지 돌아보게 됩니다. 저출산으로 문제가 되고 있는 지금 시점에, 육아의 고통을 거론하며 아이를 안 낳으려 하거나 비슷한 이유로 미혼으로 남고자 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감히 하는 소리인데, 예수님은 5+x명의 식구들을 단신으로 먹여 살리신 분이십니다. 결국에는 하나님께서 그들의 필요를 채워 주셨다는 것 역시 경험할 수 있었을 테지요[셋째를 맞이한 지 꽤 되신 이우진 목사님 가정에도 동일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안 그래도 등골 휠 정도로 노동의 극치에 달하신 예수님이신데, 남동생이란 것들은 가장인 자신들의 형을 이해해주지도 못합니다.
이 일들 뒤에 예수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인들의 거주지에서 다니려 하지 아니하셨으니 이는 유대인들이 그분을 죽이려 하였기 때문이더라.
이제 유대인들의 장막절이 가까이 왔으므로
그분의 형제들이 그분께 이르되, 여기를 떠나 유대로 들어가 당신이 행하는 일을 당신의 제자들도 보게 하소서.
은밀히 일을 행하면서 드러나게 알려지기를 스스로 바라는 사람은 없나이다. 당신이 이것들을 행하시거든 당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이는 그분의 형제들도 그분을 믿지 아니하였기 때문이더라. (요한복음 7장 1-5절)
인생 살면서 고난과 외로움을 거듭 겪으셨던 주님께서는 가장으로서 일하면서도, 12살 때부터 이미 알고 있던 사명 곧 아버지 하나님의 일 또한 계속해서 해 오셨습니다. 투잡을 뛰게 되셨음에도 아버지의 기쁨을 위하여 그렇게 일하고 일했는데, 인생에서 겪으신 그간의 외로움을 초월하는 십자가의 고통을 겪으셨으니 오죽하겠습니까.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 (마 27:46, 막 15:34)
그렇게 투잡으로 일하시며 아버지의 지상 사역에 있어 정점을 찍어가던 그 와중에도, 예수님께서는 집안의 가장으로서 마지막까지 그 도리를 다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자기 어머니와 자기가 사랑하던 제자가 곁에 서 있는 것을 보시고 자기 어머니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당신의 아들을 보소서! 하시고
그 뒤에 그 제자에게 이르시되, 네 어머니를 보라! 하시니 그때부터 그 제자가 그녀를 자기 집으로 모시니라. (요한복음 19:26-27)
예수님은 가장의 부재의 심각함을 몸소 경험하고 알고 계셨기에, 십자가에서 숨이 끊어질 때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자신이 사랑하는 제자 요한에게 자신을 대신하여 가장으로서 소중한 가족들을 돌보아 달라고 말씀하시고 그 자리에서 숨을 거두시게 됩니다.
에필로그, 나의 구원자는 가장의 본.
종려주일로 한창 미디어 금식이니, 새벽기도니 하면서 분주할 시점일 것입니다. 저 또한 랭캐스터 침례교회에서 종려 주일 있는 그 주간 새벽기도가 있어 매일 이황로 교수님과, 김에녹 목사님과(한인부설 담임목사님), 한인 성도분들과 같이 계속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기도하면서 늘 고백하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담당하시고 십자가에 못 박혀 피 흘려 죽으셨고, 죽으신 지 3일 만에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신 분이라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선 잘 알고 계실 것입니다. 그러나 인간으로 오신 주님이 가장으로서 살아오신 나날에 대해서는 사실 깊게 접근하지 않는 이상 별 신경도 쓰지 않게 되죠. 그러나 성경을 조금 더 살펴보면, 어쩐지 공생애 이전부터 어른으로서 험난한 인생을 살아오셨을 주님을 생각하자니 마음이 찡해지게 됩니다.
그래서 더욱 이에 대해서 한 번 고찰해 보셨으면 합니다. 플랜 비의 독자들 중 많은 분들이 나이를 떠나서 가장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계실 텐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구원자이시자 믿음의 기초이시기도 하시지만, 아버지라는 부담을 가진 모든 이들에게 그분께서는 또한 가장의 본이 되시는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이 글을 통해서, 가장으로서 부담을 지게 될 모든 청년 그리스도인들에게, 가장이란 이름으로 산전수전 고생을 겪으셨을 모든 그리스도인이자 아버지들께, 이 시간, 예수 그리스도라는 가장의 본께서 큰 위로와 도전이 되기를 바라며.
예수님의 유년 시절은 늘 궁금하던 주제였는데 이런 가정하에서 생각해보지는 못했던것 같습니다.
아무쪼록 잘 배우고 오셔서 많은 사람들에게 본이 되는 크리스천이 되시길 기도하겠습니다.
앞으로 수업내용 유출은 자주 해주셔도 좋을 것 같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