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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스천 민족지도자 이야기-2]

전재산 바쳐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한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천자 

우당 이회영(1867-1932)

 

KIATS 제공

 

 

애국을 말하는 사람은 많지만 자기 것을 모두 내놓는 진심을 보이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너의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도 있다고 하신 것처럼, 현재 가치 600억이 넘는 돈을 모두 국가를 위해 바친 우당 이회영의 6형제 이야기는 많은 것을 돌아보게 합니다. 돈과 힘을 어디에 어떻게 써야 하는지 보여준 신앙인이 이회영이었습니다. 이런 기독교인들을 통해 빼앗길 뻔한 나라를 지켜주신 하나님께 새삼 감사하게 되는 삼일절입니다.

  

 

한일합방의 괴변을 당하여 

반도 산하가 왜적에 속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당당 명족으로 

대의소재에 차라리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도하면 

어찌 금수와 다르리오

나는 동지들과 상의하고 

근역에서 운동하던 모든 일을 

만주로 옮겨 실천코자 합니다. 

만일 다른 해에 행운이 닥쳐와 

왜적을 파멸하고 조국을 광복하면,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왜적과 혈투하시던 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로 생각합니다. 

원컨대 백중계 모두는 이 뜻을 좇으시오.

 

-이회영

 

우당_이회영.jpg

 

 

명문가 이항복의 자손,

근대와 민족에 대한 의식을 일깨우다 

 

이회영은 1867년 4월 21일 서울 저동에서 6형제 중 넷째로 태어났다. 아버지 이유승은 이조판서·의정부참찬을 지냈고, 어머니 정씨는 이조판서를 지낸 정순조의 딸이다. 이회영의 10대조는 권율 장군의 사위이며, 이조참판·형조판서·홍문관 대제학을 지낸 백사 이항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의주까지 따라 모신 충신이었다.

그 밖에 조상들 중에도 영의정을 지낸 5대조 이종성, 병조판서를 지낸 4대조 이경윤, 예조판서를 지낸 증조부 이정규가 있다. 

 

개혁적인 성향의 집안에서 자란 이회영은 스무 살을 지나면서부터 집안의 노비에게 존댓말을 썼으며, 그들을 평민으로 풀어주기도 했다. 또한, 청상과부가 된 누이를 개가시키기도 했는데, 당시 사회에서 판서 집 딸이 재혼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1885년 이회영은 이상설, 동생 이시영 등과 신흥사新興寺라는 절에서 8개월간 합숙하면서 수학, 영어, 법학 같은 신학문을 공부하였다. 1898년 9월에는 이상설의 집에 서재를 두고, 정치, 경제, 법률, 동서양의 역사를 연구하였다.

신학문을 적극적으로 접하면서 민족의식을 점차 형성하기 시작한 이회영은 그 해 독립협회를 중심으로 이상재, 이상설, 이범세와 교류하였다. 그곳에서 민중의 계몽과 신진 정치가들의 협력, 국내외의 정책 수립에 참여하며 국가와 민족을 위해 자신이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했다.

 

이회영은 당시 시대의 답답한 심정을 <독립신문>에 ‘소년 30세’라는 시로 기고했다. 

 

세상에 풍운은 많이 일고 

해와 달은 급하게 사람을 몰아붙이는데 

이 한 번의 젊은 나이를 어찌할 것인가 

어느새 벌써 서른 살이 되었으니 

 

 

국내 민족독립운동의 든든한 조력자 

 

이회영은 세상의 풍운 속에서 젊은 나이에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며 민족의 독립과 계몽운동에 참여했다. 청일전쟁에 이어 러일전쟁으로 한반도에 대한 일제의 침략 야욕이 본격화될 즈음, 이회영은 전덕기가 담임목사로 있던 상동교회에서 세례를 받았다.

 

당시 상동교회는 독립운동의 요람으로 우국지사들이 모여 반일 민족운동을 활발히 전개하던 곳이었다. 이회영에게 그곳은 1907년 사별한 부인 달성 서씨 다음으로 이은숙을 만나 재혼을 한 의미 있는 장소이기도 하다. 이회영은 상동교회 내 민족교육기관인 상동청년학원 학감으로 지내면서 청년 교육에 힘썼다. 

 

이회영은 1905년 을사늑약 체결 후 을사오적에 대한 규탄을 주도하였고, 1907년에는 안창호, 전덕기, 양기탁, 이동녕과 비밀결사단체인 신민회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만주에 이상설과 이동녕을 특파해 교포 자녀교육을 하게 한 서전서숙을 개설하는 등 많은 일에 참여하였다.

겸손한 성품으로 그는 훗날 신흥무관학교 설립 당시에도 그러했듯 앞에서 이끌기보다는 항상 뒤에서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였다. 하지만 애국애족하는 마음은 누구 못지 않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가문 

 

1909년 신민회 비밀 간부회의에서는 독립기지 건설과 군관학교 설치를 위해 만주로의 집단 망명과 독립기지 건설을 결정하고 이회영, 이동녕, 주진수, 장유순을 파견해 독립기지로 적당한 지점을 매수케 하였다.

1910년 만주 안동현에 시찰을 다녀온 이회영은 만주 이주를 위해 막대한 자금이 필요함을 인식하고, 6형제(건영, 석영, 철영, 회영, 시영, 호영)가 가지고 있던 모든 가산을 정리하여 만주로 이주하자고 설득했다. 

 

20180301_132004.jpg

이회영(오른쪽 하단)과 여섯 형제들

 

 

한일합방의 괴변을 당하여 반도 산하의 판도가 왜적에 속했습니다. 우리 형제가 당당 명족으로 대의소재(大義所在: 인간이 마땅히 행해야 할 중대한 의리가 있음)에 차라리 죽을지언정 왜적 치하에서 노예가 되어 생명을 구도하면 어찌 금수와 다르리오…… 

나는 동지들과 상의하고 근역에서 운동하던 모든 일을 만주로 옮겨 실천코자 합니다. 만일 다른 해에 행운이 닥쳐와 왜적을 파멸하고 조국을 광복하면, 이것이 대한 민족된 신분이요, 또 왜적과 혈투하시던 이항복 공의 후손된 도리로 생각합니다. 원컨대 백중계伯仲季 모두는 이 뜻을 좇으시오. 

 

이회영의 비장한 한마디 한마디를 다 들은 형제들은 모두 제안을 기꺼이 수락했다. 6형제는 강제병탄 이후 친일파의 기세가 등등했던 시절 비밀리에 서둘러 가산을 정리하고, 당시 가치로 약 40만 냥, 지금의 수백 억 원에 해당하는 거금을 갖고 만주로 이주했다. 

 

월남 이상재는 이들의 집단 이주 소식을 듣고 이렇게 평했다. 

 

우당 일가족처럼 6형제 일가족 40여 명이 한마음으로 결의하고 나라를 떠난 일은 전무후무한 것이다. 장하다! 우당의 형제는 참으로 그 형에 그 동생이라 할 만하다. 6형제의 절의는 참으로 백세청풍이 될 것이니 우리 동포의 가장 좋은 모범이 되리라. 

 

1910년 12월 이회영 일가는 가장 추울 때인 12월 30일 압록강을 건넜다. 공식적으로 나라를 빼앗긴 시점에 한시라도 빨리 군관학교를 설치해 나라를 되찾겠다는 심정이었을지 모른다. 영하 20-30도의 추위 속에서도 새벽 네 시부터 북으로 북으로 달려 그들이 도착한 곳은 중국 유하현 삼원보였다. 이곳은 비교적 넓은 들이 펼쳐져 있어 군사훈련과 농사일을 동시에 할 수 있는 유리한 곳이었다.

이회영 일가가 만주 독립운동 기지 건설을 위해 떠났다는 소식을 들은 신민회 간부, 의병 활동가, 그리고 많은 독립운동가도 삼원보 일대에 이주해 왔다. 

 

삼원보.jpg

만주 삼원보 지역

 

 

“신민회의 정신으로 다시 일어나리라”

 

1911년 이회영이 항일 운동가들과 가장 먼저 시작한 독립운동 활동은 경학사耕學社와 신흥강습소 설립이었다. 이회영, 이동녕, 이상룡은 이주해 온 동포들의 안착과 농업 생산을 지도하는 기관으로 경학사를 조직했다. 더 나아가 이 기관은 군사훈련을 통한 독립군 양성에 목적을 두고, 무장투쟁으로 독립을 쟁취하고자 하였다.

 

경학사 건설을 마친 이들은 현지의 중국인 옥수수 창고를 빌려 이동녕을 교장으로 하는 무관학교인 신흥강습소를 설립했다. 신민회의 ‘신’자와 ‘다시 일어나는 구국투쟁’이라는 의미의 ‘흥’자를 붙였다. 보통 4년제 중학 과정인 본과와 특과 두 과정을 두었고, 최소 40여 명의 학생을 두었다. 

 

한인들은 입적入籍, 중국 토지매매와 관련해서 새롭게 이주한 곳에서 적지 않은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회영은 부친과 친교가 있었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만나러 베이징에 갔다.

임오군란 당시 조선에 온 적이 있던 위안스카이는 당시 청조의 몰락 이후 임시 대총통의 자리에 있었다. 위안스카이를 만나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받은 이회영은 위안스카이의 비서 후밍천胡明臣을 대동하고, 중국 동삼성 총독을 면담하여 한인들의 겪는 어려움을 제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에 동삼성 총독은 한인 거주지역인 회인, 통화, 유하현에 “만주인들은 한인들이 농공상업, 교육 및 기타 사업과 시설에 협력 원조하라. 한인과 절대 화친하며, 그들의 제반 사업을 침해하거나 분쟁을 일으키고, 또 한인에 조소나 모욕을 하는 자는 엄벌에 처할 것이다.”라는 훈시문을 게시하였다. 

 

하지만 아직도 토지매매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이회영은 중국 정부에 “우리가 기꺼이 왜적의 노예가 되지 않고 중국의 백성이 되고자 하는 마음을 헤아려 달라.”며 토지 매입을 강청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그렇지만 후밍천의 권유로 이회영은 통화현 합니하의 부지를 매입하고 그곳으로 신흥강습소를 옮겨 신흥무관학교 건립을 본격적으로 준비할 수 있었다. 

 

이회영 6형제는 이때 신흥무관학교 부지 매매에서부터 무관학교 학생들을 자신들의 집에 머물게 하며 돌보는 일까지 열심으로 참여하였다. 그동안의 숙원이었던 무관학교를 세우고, 원수 일제를 무찌를 수 있는 군관을 육성할 수 있게 되었다는 생각에 더 열심을 내었다. 

특히나 ‘무관학교’다운 학교가 탄생하기까지 이회영과 이동녕, 이시영, 이상룡, 김대락 같은 인물들은 희생과 헌신적인 노력을 아끼지 않았다. 이회영의 두 번째 부인인 이은숙의 자서전 기록을 보면 신흥무관학교의 명칭 역시 이회영의 작품임을 알 수 있다. 

 

우당장(이회영)은 학교 간역幹役도 하시며 학교 이름을 ‘신흥무관학교’라 하였다. 발기인은 우당(이회영), 석오(이동녕), 해관(이관직), 이상룡, 윤기섭, 교주는 이석영, 교장은 이상룡이었다. 이분은 경상도 유림단 대표로 오신 분이고, 이장녕, 이관직, 김창환 세 분은 고종황제 당시에 무관학교의 특별 우등생으로 승급을 최고로 하던 분들이다. 

 

북로군-신흥.jpg

신흥무관학교 출신이 대거 참여한 북로군정서(왼쪽), 청산리 전투에 큰 역할을 한 신흥무관학교 모습(오른쪽)

 

신흥무관학교는 1919년 합니하에서 안도현으로 이동할 때까지 3,50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이들은 독립군 전사나 비밀결사대원이 되어 일제와 무력으로 담대하게 맞섰다. 일제에 맞선 무력 독립항쟁 중 사상 최대 규모의 승리로 평가받는 청산리대첩은 신흥무관학교 졸업생이 없었다면 불가능했을지 모른다. 당시 김좌진 장군의 북로군정서와 홍범도 장군의 대한독립군에 신흥무관학교 졸업생들이 대거 포진해 있었기 때문이다. 

 

 

노장의 꺼지지 않는 독립 투쟁 

 

독립자금을 회수하러 잠시 한국에 들어온 이회영은 1918년 고종의 망명을 추진하여 새로운 독립운동의 구심점을 만들고자 했다. 고종의 지시로 민영달로부터 5만 원을 받아 베이징에 고종의 거처를 마련하였으나, 고종이 서거하자 그 계획은 좌절되었다. 고종의 서거 이후 3·1만세운동이 전국에서 일어났고, 그 결과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그러나 임시정부수립에 참여한 이회영은 임시정부 내분에 실망하여, 베이징으로 가서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했다.

이후 그는 무정부주의 운동의 중심이 될 재중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을 결성하였고, 신흥무관학교 출신을 모아 신흥학우단을 조직하는 등 끊임없이 새로운 독립운동을 모색하고, 독립운동기지 건설을 시도하였다. 

 

1931년에는 정화암, 백정기 등 7인이 상하이에 모여 항일구국연맹을 결성하고, 흑색공포단이라는 비밀행동조직을 조직하였다. 이 공포단은 중국 푸젠성 아모이 일본 영사관 폭파, 톈진항 일본 군수 물자 수송선 폭파, 톈진 일본 영사관 폭탄 투척 등 가공할 만한 무장항일투쟁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이회영은 1932년 만주에 항일의용군을 결성하고, 독립운동기지를 건설하려는 목적으로 대련으로 가는 도중 밀정의 정보 누설로 대련에 도착하자마자 일본 경찰에 검거되었다. 그리고 심한 고문으로 옥사하였으니, 그의 나이 66세였다. 

 

평생을 항일과 독립을 위해 싸워온 이회영을 사람들은 종종 ‘한국의 체 게바라’라 불렀다. 체 게바라는 쿠바혁명에서 이름을 날린 남아메리카의 전설적인 게릴라 지도자였다. 다만 이회영은 기독교 신앙을 깊이 가슴에 품고 잃어버린 대한민국을 찾기 위해 온몸을 불사른 실천가요, 지도자였다.

 

정부는 그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하였다.

 

 

 

출처 : 한반도에 울려퍼진 희망의 아리랑

김재현 엮음/ KIATS(한국고등신학연구원)

 

 

 

영화 <암살>에서 '속사포' 캐릭터를 연기한 배우 조진웅은 극중에서 신흥무관학교 출신의 '엘리트'로 나옵니다. 실제로 조진웅 씨는 신흥무관학교 기념사업회의 홍보대사로 위촉되기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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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rofile
    searcher 2018.03.01 19:21 Files첨부 (1)

    신흥무관학교.jpg

     

     옥수수 무성한 이곳에 신흥무관학교가 있었다네요. 2010년 촬영.

     놀랍게도 우당 이회영 선생이 자리잡은 저 곳 "유하현"부터 중국에 킹제임스성경이 전파되기 시작했습니다 (2005년).

     

  • ?
    리바이 2018.03.01 20:44

    망국의 선각자로서 고난과 고뇌의 연속이었던 이회영 선생님의 일생을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신흥무관학교터 사진을 보니 감회가 새롭네요. 역시 중국통이십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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